2007년 10월 7일 일요일

북한 건축 ३.0

kim sanghoon
건축


북한 건축 발전 과정
 
             
북한은 1945년 이후부터 한국과는 다른 길을 걸어 왔다. 서구의 영향을 받아 시작한 우리의 건축, 건설방식과는 달리 사회주의 국가인 북한의 건축환경과 문화는 특이한 방식으로 발전되었다. 모든 건물은 국가소유이며, 단지 개인은 이용권리만 가진다. 건물은 국가적 차원의 계획에 의해서만 지어진다. 국민 개개인은 규격화되어 있는 각 등급의 독립가옥이나 아파트 등을 신분등급에 따라 국가로부터 임대 형식으로 배정 받아 사용하고 있다. 한마디로 개인의 건축행위는 인정하지도 않으며 존재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건축행위를 규제하는 수단인 건축법 및 도시계획법은 존재하지 않고 교시나 건설령 등에 의해 건축행위를 제어하고 통제한다.
이러한 배경속에서 북한의 건축은 6.25동란 중 전체 건물의 70~80% 가 파괴되었고, 평양은 약 90%가, 주택은 약 60만호의 주택이 완전히 파괴되어, 극심한 주택난에 직면했다. 현재 평양의 건물은 모란봉의 최승대, 을밀대, 현무문 등을 제외하면 거의가 한국전쟁 이후 새로 지어진 것이다. 이조시대의 주요 건물들은 일본인이 헐어버리고, 일제 때의 도청과 화신백화점은 현 체제가 제거해 버렸다. 그리고 한국전쟁 때 나머지건물의 대부분이 폭격과 화재로 없어졌다고 한다.
휴전직후에 북한은 평양을 비롯한 파괴된 도시의 복구와 건설에 주력했으며, 농촌주택 건설은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본격화 되었다. 비록 전쟁 때 많은 것이 파괴되었지만 ,과거 사회주의 블록의 막대한 원조에 힘입어 시멘트, 강재, 요업공장 등이 짧은 기간 내에 복구.확장 되었으며, 50년 대말에는 평양을 비롯한 도시건설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동구 사회주의권 블록의 나라들이 도시건설을 직접 지원하는데, 헝가리가 평양, 구 동독이 함흥, 구 체코슬로바키아가 청진에서 도시 구획을 맡아서 계획에서부터 시공까지 해주었다. 이들이 건설한 3∼4층의 저층 건물들은 평양시에서는 70년대 중엽 재개발로 완전히 사라지고, 함흥과 청진에는 아직 일부분이 남아있다. 즉 근대 사회주의 건축이 그대로 전이되어온 시기이다.
전후 복구사업이 활발이 전개된 1950년대에는 주택의 표준화와 규격화가 건설의 가장 큰 과제였다. 주택의 표준화와 규격화는 주민들의 생활환경을 집단화하고, 밀집화하는 사회주의 생활양식을 지향하는 당시 북한 사회분위기와 짧은 기간내에 대량의 주택이 필요한 상황에서 건축 및 건설에서 필수적인 것이었다. 설계의 표준화와 규격화, 건재생산의 공업화, 건설의 기계화 등은 5ㆍ60년대에 북한사회가 직면한 주택부족을 해결하기 위한 가장 현실적인 방안이었다. 도시에서는 고층아파트가 농촌에서는 2∼3세대가 구성된 2층의 연립주택이 조립식 공법으로 건축되었다. 이시기에 지어진 건물의 특징은 개성이 없고 무미건조하다는 것이다.
북한은 최근 주택부족 해결을 위해 평양을 비롯한 원산, 청진, 남포 등의 도시에 5∼10층의 아파트를 기본으로 하면서, 40층 이상의 고층아파트를 건설하고 있으며, 농촌에는 2∼3층의 연립주택을 대량으로 건설하고, 또한 기존의 낡은 주택을 개량하는 사업을 꾸준히 시행하고 있으나, 심긱한 경제위기로 인하여 계획대로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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