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2월 13일 수요일

숭례문 전소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4가에 있는 조선시대 성문.
지정번호
국보 제1호
지정연도
1962년 12월 20일
소재지
서울시 중구 남대문로 4가
시대
조선시대
종류
성문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5칸, 측면 2칸, 중층(重層)의 우진각지붕 다포(多包)집이다. 서울 도성의 남쪽 정문이라서 통칭 남대문(南大門)이라고 불린다. 1394년(태조 4) 창건되었으나 지금의 건물은 1447년(세종 29)에 개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61∼1963년에 있었던 해체, 수리에 의한 조사에서 1479년(성종 10)에도 비교적 대규모의 보수공사가 있었던 것이 밝혀졌다.이 문은 중앙부에 홍예문(虹蜺 門)을 낸 거대한 석축기단 위에 섰으며, 현존하는 한국 성문 건물로서는 가장 규모가 크다. 석축 윗면에는 주위에 높이 1.17m의 벽돌로 된 여장(女墻)을 돌려 동·서 양쪽에 협문(夾門)을 열었고, 건물의 외주(外周) 바닥에는 판석(板石)을 깔았다.
건물 내부의 아래층 바닥은 홍예 윗면인 중앙간(中央間)만을 우물마루로 하고 나머지는 흙바닥이다. 지붕은 위·아래층이 모두 겹처마로 사래 끝에는 토수(吐首)를 달고 추녀마루에는 잡상(雜像)과 용머리[龍頭], 그리고 용마루 양가에는 독수리머리를 올렸다.이 건물은 특수한 목적을 가진 성문이기 때문에 천장을 가설할 필요가 없어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다. 특기해야 할 것은 이 건물의 지붕형태가 어느 시기에 변경된 것인지 뚜렷하지 않으나 당초에는 평양 대동문 또는 개성 남대문과 같은 팔작지붕이었다는 것이 해체, 수리 때의 조사에서 드러났다.




























kim sanghoon
건축 과 시사
대한민국 국보 제1호 남대문이 불길로 무너져 내리면서 이를 두 눈 뜨고 바라만 봐야 했던 국민들의 가슴도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화마의 잔해가 채 가시지도 않은 상태에서 공무원의 최고지휘권자가 될 이명박 당선인은
국민성금으로 남대문을 복원하자는 제안을 했다고 한다. 민심은 천심이라고 했나. 대다수 국민들이 '기가 막히다'며 당선인을 향해 반대와 비난의 돌을 던지고 있다.

관련 공무원들이 줄줄이 불려가며 국회에서 추궁을 받고 있다. 추궁을 하는 국회의원들의 얼굴이야 그렇다 치고, 일만 터지면 위기 넘기기에 급급한 공무원들의 궁색한 답변을 보면서 앞으로의 희망보다 암담함이 드는 까닭은 무엇일까?

아마도 지겹도록 보아 온 유사한 사건들의 반복 때문일 것이다. 다리가 무너지고, 건물이 폭삭 내려앉는 등 수많은 사건과 사고 속에 공무원들이 개입되지 않은 일은 거의 없다.

공무원은 개혁대상이 아니고 개혁주체라고?

한번 실수는 병가지상사요, 두번 실수는 관용의 대상일 수도 있지만, 세번째 유사한
실수는 실수가 아니라 반복되는 습관으로 빚어진 관행의 결과일 뿐이다. 당연히 삼진아웃, 영구 제명을 시키든지 해서 사건의 근본원인을 뿌리부터 제거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는 어떠했는가? 냄비처럼 들끓는 호들갑, 지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일상으로 돌아가고, 뭐 하나 개선하자고 하면 전례가 없니, 예산이 없니 하며 갖은 저해요인을 불러 세운다.

그러는 사이 또 다른 사건의 단초는 무르익어가고 사고발생의 시기만 기다리고 있는 것이
지금 우리 사회에 하나 둘인가. 수십 년 동안 대통령들이 새로 취임할 때마다 공직사회 개혁을 외치다가도 슬그머니 꼬리를 내린다. 그러면서 한마디 덧붙인다.

"공무원은 개혁의 대상이 아니라 개혁의 주체"라고.

이런 애매모호한 말로 어영부영 공직사회를 껴안고 가다가 복지부동, 무사안일로 체질이 굳어진 공무원들의 행태로 인한 손해는 대한민국 사회가 고스란히 떠안고 가는 것이다.

공무원들은 개혁의 대상이 되기 싫으면 스스로 자신의 몸에 개혁의 칼로 썪은 살을 도려내야 한다. 그러나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말이 괜히 나왔을까. 개인이나 집단이나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일이야 발 벗고 나서지만 개혁은 스스로의 뼈를 깎는 일인데 과연 스스로 주체가 될 수 있을까? 그렇게 쉽게 기대해도 될 일일까? 공직사회 개혁을 외치며 뒤늦게 합류한 공무원 노조가 과연 제 역할을 하고 있는가?

지금 새 정부가 들어서는 시점에 공무원들에게 강도 높은 개혁을 요구 못할 이유가 없다.
온 나라의 젊은이들이 공무원이나 유사한 직종에 들어가려고 눈에 불을 밝히는 실정이다.
그 이유가 대기업이나 타 직종보다 더 편하고 정년 보장되고 월급도 적지 않고 게다가 덤으로 완장의 권력도 주어지기 때문이 아닐까.

이런 이유로 수백대일의 경쟁을 뚫고 공무원이 된 이들에게 대국가, 대국민 봉사와 헌신은
기대하기 힘들다. 편하려고 공무원이 됐는데 누가 일을 만들어 사서 고생을 하려 하겠는가? 요즘은 공무원도 직장인이라며 노조를 통해 경제적 이익이나 얻으려고 관심을 쏟고 있는 실정이다.

한창 도전과 창의력으로 다양한 업종에 진출해야 할 젊은이들이 공무원이 되려고 떼로 쏠리는 것도 사회적 병리현상의 하나이다. 공무원은 정년이 보장되는 혜택과 함께 국민을 섬기는 봉사와 희생정신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래서 공무원은 편함 대신 봉사를 통한 명예와 자긍심으로 일관된 사람들이 그 자리에 있어야 대한민국의 미래가 있고, 남대문 화재 같은 참담한 일도 사전에 예방될 것이다.

이명박 정부의 성패는 멀리서가 아니라 바로 이명박 자신의 손으로 결재하는 공직사회의 개혁에 달려있다

숭례문 방화 피의자 구속영장 신청
경찰, 채씨 단독범행 잠정결론 … “관계기관 사실확인후 위법 나오면 처벌”
2008-02-13 오후 1:45:36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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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 국보 1호 ‘숭례문’에 불을 지른 혐의로 경찰의 수사를 받고 있는 채 모(69)씨에 대한 구속영장이 신청됐다. 경찰은 13일 오전 서울 남대문 경찰서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채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채씨의 단독범행으로 잠정결론을 내리고 향후 화재이후 관계기관의 초동대응 등에 대한 책임문제에 대해 수사를 벌일 예정이다. ◆채 모씨 어떤 처벌받나 = 숭례문 방화 피의자 채씨는 수사당국의 범죄사실이 법원에서 확정될 경우 최고 무기징역까지도 받을 수 있다. 형법 165조는 불을 놓아 공용 또는 공익적 건조물을 훼손한 경우 3년 이상의 유기징역과 최고 무기징역까지 가능하도록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문화재 방화 피의자에 대한 형량은 대체로 가벼웠다. 지난 2006년 5월 수원 화성 서장대 목조누각 2층을 태운 20대 남성은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채씨가 같은 해 4월 창경궁 문정전에 불을 질렀을 때도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대부분 초범이고 피해정도가 가벼웠다는 게 법원의 판단이었다. 다만 이번 숭례문 방화는 사정이 다르다. 대상이 국보 1호라는 상징성과 ‘전소’라는 피해정도, 국민감정을 고려할 때 중형이 불가피 하다는 것이 법조계 안팎의 분석이다. 특히 채씨가 동종 범죄로 이미 형을 받고 집행유예 기간중이라는 점도 법원의 결정에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경찰, CCTV 화면 판독 못해 = 경찰은 12일 피의자 채모씨로 추정되는 인물이 숭례문에 오르는 모습이 담긴 폐쇄회로(CC)TV 영상을 확보해 또 다른 물증을 찾거나 공범여부를 파악하려 했지만 지금까지 확보한 것 외에는 뚜렷한 혐의를 찾아내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남대문 경찰서는 13일 10시 기자회견을 갖고 “경찰청 교통관제 CCTV를 확보해 사건 시간대에 한 사람이 숭례문을 오르는 모습이 담긴 영상을 찾았다”며 “하지만 영상이 너무 희미해 채씨인지는 확인하기 어려워 국과수에 정밀감정을 의뢰했다”고 말했다.경찰은 목격자들의 진술과 채씨의 자백을 토대로 숭례문 방화를 단독 범행으로 잠정결론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관계기관 책임공방 조사 예정 = 경찰은 채씨에 대한 수사와 구속영장이 신청됨에 따라 향후 관계기관에 대한 수사를 벌여나갈 전망이다. 경찰은 지난 10일 서울 중구청 관계자들에 대한 소환조사를 벌인데 이어 곧 문화재청과 소방방재청 등의 관계자를 불러 수사를 벌일 예정이다. 현재 문화재청과 소방방재청 등은 화재진압 실패의 책임을 둘러싸고 상대방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있어 경찰 수사결과가 주목된다. 문화재청은 소방당국에 화재발생 1시간 만에 ‘지붕을 뜯어서라도 진화를 해달라’고 요청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소방방재청은 문화재청 때문에 불을 제때 끄지 못했다고 책임을 돌려왔다. 이들 기관은 △화재 진압 시점 △소극 진압의 책임 △숭례문 관리 책임 등을 놓고 사사건건 충돌했다.경찰은 이들 기관들에 대한 사실관계를 조사해 위법사실이 나오면 관련 법규에 따라 처벌한다는 방침이다. 이상선 기자 sslee@naeil.com
문화
숭례문과 남대문 / 서영훈

문화재 테러와 정치
600년 역사의 증인을 순식간에 불살라버린 서울 남대문방화사건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이 사건의 동기에서부터 요즘 남대문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풍경들은 우리의 진면목과 우리 사회의 여러 단면들을 한꺼번에 노출시키고 있다. 쓰러진 문화재 앞에 조화와 빈소까지 차려놓고 구슬픈 만가까지 불러가며 장사지내는 풍경은 아마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정경일 것이다. 그 수많은 인파…남녀노소 가릴것 없이 숙연한 표정으로 화염속에 쓰러진 ‘600년’을 바라보고 있다. 고사리손들이 ‘남대문아 미안하다’고 게시판에 써내려 갈 때는 찡한 마음을 가누기 어렵다. 국민들이 남대문에 보인 애착심은 당연한 것이지만 한편 놀랍기도 하다. 조상님들에 대한 숭배정신, 문화재사랑, 정부와 권력에 대한 분노와 자책등이 한데 어우러진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렇도록 국민들의 사랑을 받는 문화재가 그 관리책임의 소재도 불분명한 채 방치되어왔다는 사실 또한 놀랍다.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 그리고 그 수많은 문화재보호단체와 기구들은 그동안 무얼 했단 말인가. 도롱뇽을 지키겠다며 터널공사를 막아선 한 스님 때문에 1조원이 넘는 추가비용을 쾌히(?) 지불했다는 대한민국에서 국보 제1호를 길가의 돌맹이 보듯 했다는 말인가. 노숙자들이 남대문 누각에 올라가 술먹고 담배 피고 방뇨까지 하고 있을 때 행정당국이나 문화재살리기 시민단체나 남대문주변의 주민들은 과연 그런 사실을 까마득히 몰랐다는 말인가. 화재 당일의 현장도 이해할 수 없다. 국록을 먹고 불끄는 것이 직업인 소방당국은 불이 난 현장에서도 엉뚱한 짓을 하고 있었다. 방화범이 2층 누각에 놓은 불이 기둥을 타고 천정으로 올라갔는데도 엉뚱한 곳에 물을 뿌리고 있었다. 남대문의 구조를 몰랐다니 놀랍고 그것도 유분수지 천장속으로 올라간 불을 진정 몰랐다는 말인가. 아마도 공무원들의 무사안일, 복지부동, 눈치보기 소심증들이 그들로 하여금 국보1호가 불타는 현장에서까지 허둥대게 만들지는 않았을까. 토지보상 불만으로 불을 질렀다는 방화범은 자못 당당하다. 정부에 복수한 것인데 일이 커져서 미안하다는 정도인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방화범이 정신이상자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그의 정신은 너무나 멀쩡했다. 우리가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측면(사실은 이것이 가장 중대한 부분인데)은 그의 죄의식이다. 내 불만을 정부가 해결해주지 않아서 홧김에 그렇게 한 것인데 대죄를 지은 것은 아니라는 의식이다. 남대문도 복원하면 된다고 수습책(?)까지 친절하게 제시했다. 한많은 사람들이 정권을 잡고 한없이 한풀이를 하는 증세에 그도 감염되었다는 말인가. 남대문에 대한 통곡현상이 하나의 사회적 신드롬이 되고 있는데 대해서는 심리학자들의 분석이 있어야 할 부분이지만 이번 사태에 정치적인 함의는 없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번 남대문 방화테러의 이면에는 과거를 하찮게 생각하는 인식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홧김에 불을 질렀고 남대문은 복원하면 된다고 주장하는 방화범의 말 속에는 ‘600년 역사? 그것이 뭐 대단하다는 말인가’하는 인식이 숨어 있었을 것이다. 이런 인식이 최근 10년간 집권한 사람들이 벌여온 줄기찬 과거사부정과는 아무 연관이 없는 것일까. 갖가지 과거사조사위원회가 설치고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걸핏하면 ‘별놈의 보수’라는 극언까지 해가며 과거를 부정해온 것은 사실이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은연중 우리 과거가 이룩해 놓은 성과물들은 별것이 아니라는 식의 비틀린 풍조가 조성된 것은 아닐까. 진보좌파가 득세한 지난 10년간 그들은 건국과정과 발전과정의 문제들을 극대화시켜 과거사를 부정하고 국민적 저항과 노력의 결과인 민주화과정을 그들만의 공로로 미화함으로써 입지를 다지기에 급급했다. 문제는 잘못한 것과 잘한 것에 대한 공정하고 균형있는 평가인 것이다. 그들도 역시 자신들이 비난했던 과거 정권들처럼 권력을 즐겼고 갖가지 비리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권력남용, 인사청탁, 친인척부패, 뇌물, 정치자금 스캔들에 세금폭탄까지…. 무엇이 과거와 다른가. (언론인· 순천향대 교수)

세계고층봄철에 쌓은 곳에 물이 솟아나서 무너진 곳이 있으므로, 석성으로 쌓고 간간이 토성을 쌓았다. (중략) 정북은 숙청문, 동북은 홍화문이니 속칭 동소문이라 하고, 정동은 흥인문이니 속칭 동대문이라 하고, 동남은 광희문이니 속칭 수구문이라 하고, 정남은 숭례문이니 속칭 남대문이라 하고, 소북은 소덕문이니 속칭 서소문이라 하고, 정서는 돈의문이며, 서북은 창의문이라 하였다.’
▼조선은 태조 3년(1394년)에 도읍을 송도 즉 개성에서 한양 즉 서울로 옮긴 뒤 수년에 걸쳐 성곽을 쌓고는 각각 4개의 대문과 소문을 세웠다. 각 문의 이름은 조선왕조실록 태조 5년 9월24일조에 이처럼 세세히 기록돼 있다. 조선은 이 가운데 도성의 정문격인 숭례문에는 태종의 장남 양녕대군이 쓴것으로 전해지는 현판을 다른 곳과는 달리 세로로 걸어 놓았다.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막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한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로 기록되고 있던 남대문은 지난 1962년 문화재보호법 제정 당시 국보 1호로 지정됐다. 온갖 전란에도 불구하고 600년을 버텨온 역사성에다 도성에서 차지하는 위치, 그리고 건축미 등에 견줘 대한민국 최고의 보물 대접을 받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태조 4년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년에 완성된 남대문은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작은 성인 옹성을 따로 두지 않은 것으로 미뤄 방어의 목적보다는 도성을 오가는 주된 출입구로서의 상징성을 강하게 가졌던 것으로 해석된다.
▼‘서울 가보지도 않은 사람이 숭례문을 남대문이라 우긴다’는 우스개가 한때 유행했다. 추사 김정희도 그 필체에 감탄했다고 하는 崇禮門(숭례문) 세 글자가 남대문에 떡하니 걸려 있었지만, 남대문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사람이 어찌 숭례문을 알 수 있었으랴. 하긴 숭례문이면 어떻고, 남대문이면 어떠랴. 실록에도 나라님이 부른 이름은 숭례문이었지만, 백성들이 부르는 이름은 남대문이었다고 적고 있다. 수백년의 역사를 거치면서 서울시민뿐 아니라 국민들의 가슴 속에 나라의 문으로 각인된 것이 남대문이었다. 이런 남대문이 방화로 몇 시간 만에 잿더미로 변했으니, 국민적 상실감이 크지 않을 수 없다.
서영훈 문화체육부 차장 건물디자인 사진
개인이야기
http://thebritishmusum.hoonsolo.com/thebritishmusum.hoonsolo.com
건축법

숭례문


















서울문화재 > 유적ㆍ명소 > 산성ㆍ성곽

서울숭례문(남대문)


 




kim sanghoon
건축
문화

서울숭례문(남대문) 서울崇禮門(南大門)

지정번호
:
국보 제1호

지정연월일
:
1962년 12월 20일


시 대
:
조선 태조 5년(1396)


규모·양식
:
1동 정면 5칸ㆍ측면 2칸, 건평 53.79평, 2층의 우진 각 지붕 다포집


재 료
:
석조 기단, 목조


소 유 자
:
국유


소 재 지
: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4가 29
서울 숭례문은 조선시대 서울 도성(都城)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이며,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대문(南大門)이라고도 불렀다.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태조 4년(1395)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 지금 있는 건물은 세종 29년(1447)에 고쳐 지은 것인데 1961~1963년 해체ㆍ수리하는 과정에서 성종 10년(1479)에도 큰 공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1962년 숭례문을 중수할 때 나온 숭례문 상량일자를 묵서(墨書)한 대들보가 세개 발견되었다. 첫째는 태조 때 창건 당시의 대들보요, 둘째는 세종 때 개수시의 대들보요, 셋째는 성종 때 개수시의 대들보이다. 창건 당시인 태조 때의 대들보에는 "홍무이십구년병자시월초지일상량(洪武二十九年丙子十月初之日上樑)"이라고 묵서되어 있으니, 홍무 29년은 태조 5년(1396)에 해당하므로 이 해 10월6일에 상량하고 2년 후인 태조 7년 2월 8일에 준공하였다. 따라서 숭례문은 태조5년에 창건하였고 2년 후에 다시 고쳐지었음을 알 수 있다. 세종 4년(1422) 도성을 개축할 때에는 손을 대지 아니하고, 세종 30년(1448)에 개축하였다. 이때 개축한 이유는 숭례문이 기울거나 퇴락하여 개축하려고 한 것이 아니고, 지대가 낮아서 볼품이 없고 또 당시 유행하던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에 구애되어 숭례문의 지대를 높여서 남산과 인왕산의 산맥에 연결시켜 경복궁이 포국을 아늑하게 형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저런 사정으로 개축공사는 뒤로 미루어지다가 15년 후인 세종 29년(1447) 8월에 착공하였는데, 숭례문이 문루와 석문을 완전히 헐어내고 기지를 높게 돋우어 양쪽 산맥에 연결시킨 다음 그 위에 새로 석문을 쌓고 문루를 건축하였으므로, 보수나 중수가 아니라 완전한 개축이었다.1962년에 발견된 대들보 가운데 "정통십삼년무진삼월십칠일손시입주상량(正統十三年戊辰三月十七日巽時立柱上樑)"이라고 묵서한 것이 곧 이때의 대들보로서, 세종 30년 3월 17일에 상량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그 후 32년이 지난 성종10년(1479)에 이르러 숭례문이 기울어졌기 때문에 또다시 개축하였다. "성화십오년기해사월초이일묘시입주상량成化十五年己亥四月初二日卯時立柱上樑)"이라고 묵서한 대들보에 의하여 성종 10년 4월 2일에 기둥을 세우고 상량한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채수(蔡壽)와 좌승지 김승경(金升卿)등이 숭례문을 증수할 때 중국의 예에 의하여 문 밖에 옹성(甕城)도 쌓자고 하였으나, 성종이 "우리나라는 국력이 부족하여 일일이 중국을 본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적이 숭례문까지 쳐들어온다면 그 때는 이미 나라가 망하게 되는 것이니 옹성이 있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라고 답하여 흥미롭다.지금은 숭례문 중앙이 문이 아니라 양옆으로 난 도로가 지난날 성문의 역할을 하고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서울성곽이 동쪽의 남산에서 내려와 오늘날의 힐튼호텔 앞을 지나 숭례문에 연결되었고, 서쪽에서는 서소문으로부터 상공회의소 앞을 지난 성벽이 숭례문에 직접 연결 되어있었기 때문에, 사람과 가축은 이 성문을 통하지 않으면 도성을 출입할 수 없었다.숭례문 주변의 성벽이 결정적으로 훼손된 것은 광무(光武) 3년(1899) 서울 시내 전차(電車) 노선 공사와 개통으로 인하여 동대문ㆍ서대문이 주변과 함께 헐리게 되면서부터이다. 더욱이 일제강점기 도시계획이라는 미명하에 파괴가 가속화되었고, 특히 숭례문 남쪽으로부터 남산이 정상에 이르는 성벽은 남산광장에 일제가 소위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지으면서 전연 찾아볼 수 없다. 다만 현재는 남산광장에서 정상에 이르는 도보 길에 일부가 남아 있을 뿐이다.숭례문은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축대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을 두고, 그 위에 정면 5칸ㆍ측면 2칸 크기로 지은 누각형 2층 건물이다. 지붕은 앞에서 볼 때 사다리꼴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러한 지붕을 우진각지붕이라 한다. 지붕처마을 받치기 위해 기둥 윗 부분에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그 형태가 굴곡이 심하지 않다.'崇禮門'이라는 현판은 《지봉유설(芝峯類說)》에 의하면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하여 세로로 양녕대군(讓寧大君)이 썼다고 한다. 이 문은 임진왜란 때 성내의 대부분 건물이 소실된 가운데 불과 몇 채 안 남은 건물 중의 하나로 비교적 고려말 이래의 다포(多包)집 양식을 충실히 남기고 있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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