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7월 14일 토요일

hoonsolo&kimsanghoon(peter)건축이야기



hi,hoonsolo।

스카이라인
고층건물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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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hoonsolo.

안녕하세요.

세계고층빌딩 디자인너

스카이라인
스카이라인【지평선】the horizon;【하늘에 그어진 윤곽】a skyline [명사]
1 =지평선.
2 하늘과 맞닿은 것처럼 보이는, 산이나 건물 따위의 윤곽선.

꼭대기 층에는 스카이라운지가 있습니다.

소묘와 건축






미켈란젤로 - The Colonna Pieta





회화의 가장 근본적인 단계라 할 수 있는 드로잉의 어원인 디세뇨(disegno)는 '선긋기'라는 의미다. 서양미술사 초기의 드로잉은 대개가 완성된 자굼을 위한 보조수단이나 사물의 묘사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르네상스에 접어들면서 인간의 형이상학적인 사고의 표현매체가 되었다.



고대의 디세뇨(disegno) 개념

고대의 디세뇨? 이탈리아어 디세뇨(disegno)는 ‘표시하다’는 뜻의 라틴어 designare에 뿌리를 둔 근대미술 개념이다. 그러나 고대미술이나 미술이론에서 디세뇨라는 표제어를 찾는 건 불가능하다. 굳이 의미를 끼워 맞추자면 ‘그라페인(graphein)’을 비슷하게 붙일 수는 있다. 그라페인은 ‘그래픽’의 어원을 이루는 말로,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쓰다’와 ‘그리다’ 두 가지 의미를 가졌다고 한다. 15~16세기 미술 문헌들에도 디세뇨의 정신적 가치를 역설하기에 앞서 그라페인이 글과 그림의 같은 뿌리라는 사실을 언급한 일이 많았다. 이들은 전부 뾰족한 도구를 써서 선을 긋는 작업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문헌에서는 그라페인의 말뜻을 언급하고 나서 글과 그림이 두 갈래로 나뉘기 전에 하나로 뭉쳐 있던 사례로 이집트 상형문자를 들먹이기 마련이다.

예술가 가운데 선긋기의 대표 주자는 아펠레스로 알려져 있다. “하루라도 선 긋는 연습을 빼먹지 말라”라는 뜻의 ‘nulla dies sine linea’라는 격언이 그에게서 나왔다고 한다. 이 기록은 기원후 1세기에 씌어진 플리니우스의 《박물지》에 전하는데, 르네상스 이후 널리 읽히는 바람에 이탈리아의 많은 미술 공방에서 “하루도 소묘 연습을 게을리하지 말라”는 의미로 인용되었다고 한다. 아펠레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궁정 화가로 명성을 날렸고, 그의 애첩 판카스페와 사랑에 빠져서 ‘바다 거품에서 태어나는 아프로디테’를 그린 일화는 유명하다.

또 프로토 르네상스 화가 조토는 훗날 나폴리 국왕 앞에서 조토(Gi-O-tto)의 이름 한가운데 들어가는 O보다 더 동그란 원을 그려서 아펠레스가 말한 선긋기 수련의 모범을 과시했고, 바로크 화가 렘브란트는 워싱턴 갤러리 자화상에서 뒷벽에다 조토의 원을 두 개나 덧그려서 달인의 경지에 오른 선긋기의 내공을 뽐냈다. 그런데 아펠레스는 무슨 선을 어디에다 어떻게 연습했을까? 화가였으니 펜 말고 붓으로 그렸을지 모른다. 또 고대의 선긋기가 단순히 손의 숙련을 의미하는지, 빛과 어둠의 균형을 잡으면서 그림을 구성하고 줄거리를 짜는 정신적 숙련까지 포함했는지도 딱 부러지게 단정하기 어렵다.

카이사르의 공병대장이었던 비트루비우스는 건축가에게도 그림 그리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건축(10권)》의 1권 서문에서(?) 회화의 숙련을 건축가의 교과로 꼽는데, 주문자에게 보이기 위한 건축 조감도나 평면도, 입면도 따위의 기술적인 도면을 제 손으로 완성할 만큼 실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뜻으로 읽힌다. 그렇다면 로마 건축가의 ‘그림 그리기’가 근대적 소묘의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셈이다.

고대 조각가들도 소묘 기술을 익혔을 것이다. 부조는 말할 것도 없고, 석조 환조에서는 돌덩어리 위에 조형의 윤곽을 직접 그리거나 따로 종이에다 밑그림을 완성해서 참고했으니까. 물론 종이값이 만만치 않아서 실제 크기는 드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집트 조각에서는 인체나 동물의 비례가 정해져 있어서 실물 크기의 밑그림 도안을 상용했다.

공예에서는 모자이크 밑그림과 도기 그림을 들 수 있다. 특히 도기 표면에 그림을 그리는 도기 화가들이 소묘에 능했다. 이 그림들은 대부분 그 당시 유명한 대형 그림들의 주제와 소재들을 베껴 그린 것들이다. 덕분에 지금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그리스 회화의 실체를 대강이나마 짐작하는 근거로 요긴하다. 도기는 대개 그릇 굽는 사람과 그릇에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달랐다. 도기 화가의 역할이 어엿이 나누어 있었던 셈이다. 도기 그림은 대형 그림과 여러 가지가 달랐는데, 특히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이렇다. 첫째, 도기 그림은 크기가 작다. 둘째, 도기의 곡면을 고려해서 그린다. 셋째, 단단한 표면을 긁어서 작업하는 흑색상 도기 그림은 작업 방식이 다르다. 넷째, 도기를 고온에 구워야 하므로 그림에서 색채를 제대로 표현해 내기 어렵다.


회화의 근원 ­선긋기

그리스 도기 화가들은 형태의 윤곽선을 긁어 내거나 새겨 넣었다. 소묘도구는 붓대롱을 거꾸로 쥐거나, 뾰족한 나무칼이나 철필을 사용했다. 흑색상에서 자주 있는 채색 도기화를 그릴 때는 가는 붓에 색을 묻혀서 첨필했다. 적색상은 붓으로 윤곽선을 그렸기 때문에 흑색상보다 훨씬 부드럽고 붓맛이 살아났다. 정교하게 반복되는 장식보다 눈이나 입술의 표정을 다양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 도기 화가들의 소묘 작업은 근대적 의미의 ‘정신적’ 밑그림과는 달랐다. 무엇보다 그림 순서가 거꾸로였다. 먼저 바닥칠을 하고 초벌구이를 거친 다음, 나중에야 단단해진 도기 표면에다 윤곽선을 새겨 넣었기 때문이다.

플리니우스의 첫 초상 소묘에 관한 일화가 전한다. 그릇 굽는 옹기장이 부타데스의 딸이 이웃 총각과 사랑에 빠졌는데, 남자를 세워두고 호롱불을 비춘 다음 벽에 비친 그림자 윤곽을 뾰족한 도구를 가지고 새긴 것이 사람 얼굴을 그린 첫 그림이었다는 것이다. 또 부타데스는 딸이 그린 윤곽선을 따라 점토를 발라서 얼굴 형태를 빚고 가마에 넣어서 구워 냈다고 하는데, 이로써 첫 초상 조각이 탄생하게 되었다고 한다. 플리니우스는 또 귀게스가 호롱불을 켜서 벽에 비친 제 그림자를 따라 그림자 그림을 그린 것이 회화의 기원이라는 일화도 전한다. 부타데스의 딸이나 귀게스의 일화는 회화가 소묘에서 나왔다는 공통점말고도, 둘 다 어두운 곳에서 빛을 등지고 벽에 비친 그림자를 관찰한다는 점에서 플라톤의 유명한 동굴 비유를 연상케 한다. 또 이데아와 현실의 관계를 현실과 회화의 관계에 비유했다는 점에서 고대인들이 회화를 어떻게 생각했나 엿볼 수 있다. 한편, 고대의 그림자 그림은 조토나 기베르티가 돌이나 흙바닥에 그림자 그림을 그리며 재능을 자랑했다는 근대 일화로 탈바꿈한다.

점에서 선으로 또 면으로

플리니우스는 또 아펠레스와 프로토게네스 사이의 색다른 경쟁 일화를 소개한다. 선긋기 시합이었다. 왜 하고 많은 주제들을 제쳐 두고 하필 선긋기였을까? 먼저 아펠레스가 붓에 ‘한 가지 색을 묻혀서’ 빈 화면 위에다 정교한 선을 그었다. 프로토게네스는 ‘그 선 안에다 다른 색으로’ 또 하나의 선을 긋는다. 먼저 그었던 선보다 더 정교한 선이었다. 마지막으로 붓을 든 아펠레스는 그 안에다 ‘세 번째 색으로’ ‘여러 차례’ 선을 그어서 더 이상 붓을 댈 자리를 남겨 두지 않았다. 이 그림은 텅 빈 큰 화면 안에 맨 눈에는 잘 보이지도 않는 지극히 정교한 선(linea somma tenuitatis) 하나가 달랑 그려져 있었을 뿐인데도 숱한 구경꾼과 화가들의 감탄을 자아냈고, 또 어떤 대작들보다 비싸게 쳤다고 한다. 기원전 4세기 로도스 섬에서 벌어졌던 선긋기 시합을 두고 미술사는 기베르티 이후 스무 가지가 넘는 해석을 내놓았다. 곰브리치는 논문 <아펠레스의 유산>에서 한 가닥 선 안에다 세 차례나 번갈아 칠하는 시합 과정이 사실은 하나의 형태에 음영과 무게를 주고 빛의 효과를 부여해서 평면 회화를 실물처럼 보이게 하는 부조 효과를 노렸다고 추측했다. 소묘가 회화로 진화하는 과정이 선긋기 시합의 일화에 일찌감치 내포되었다고 보았다.

르네상스의 소묘

“예쁜 색을 내는 물감이야
리알토 가게에 가면 살 수 있지만,
소묘하는 법을 제대로 익히려면
수없는 밤을 지새워서
영혼의 서랍을 열고 꺼내야 한다네.” ­자코포 틴토레토

소묘(disegno)는 르네상스 미술의 빗장을 벗기는 만능 열쇠다. 그때 사람들은 다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소묘를 작품의 제작과정에 발생하는 보조 수단으로부터 해방시킨 것은 르네상스의 자유로운 공기였다. 시민 계급이 발흥하고, 상공업과 초기 자본주의가 뿌리를 내리고, 개개인의 창의와 재능에 주목하기 시작한 이탈리아 도시들에서 다양하고 독창적인 양상으로 전개된 소묘는 이를테면 예술가의 생존 무기와 같았다. 진정한 소묘의 원리를 도나텔로가 발명했다고 보았던 바사리(1550), 그리고 “르네상스 이전에는 올바른 소묘의 개념이 털끝만치도 없었다”고 단정한 구에바라(1560)의 발언은 르네상스 시대에 발흥한 새로운 미술의 자부심과 소묘의 의미에 대한 인식을 잘 함축한다.
이탈리아에서는 지금도 자기 집만의 비방으로 스파게티 소스를 담드는데, 르네상스 시대의 공방에서도 소묘마다 손맛이 달랐다.

예컨대 라파엘로가 남긴 소묘가 고전적 비례와 조화 감각에 기초한 짜임새 있는 명료성과 유연성이 특징이라면, 미켈란젤로가 그린 소묘는 긴박하고 생동감 넘치는 힘과 긴장에다 정신과 실행 사이의 단호하고 속도감 있는 상관성이 두드러진다. 화가뿐이 아니었다. 조각가, 건축가, 세공사, 축제 이벤트 전문가, 갑옷과 병장기 도안사, 직물 디자이너 등등 누구든지 소묘를 몰라서는 곤란했다. 이때는 어디서나 소묘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일화와 만담, 동화에도 소묘 소재가 단골로 등장했다. 조토가 양 그림자를 바위에다 그렸던 일은 토스카나에서는 이미 상식에 속했다. 다빈치도 수기 노트 귀퉁이에다 알쏭달쏭한 만담 한 토막을 소개한다. “나 좀 그만 괴롭혀! 밤낮 지저분한 검정 같은 걸로 남을 망쳐 놓고 말이야.” 종이가 잉크한테 발끈 쏘아붙였다. 잉크 왈, “이 사람아. 자넬 망친 게 아니라 의미를 붙인 거야. 이제 자넨 종이가 아니라 어엿한 작품이 된 거라구.”

소묘는 모든 회화예술의 원천이다.

카스틸리오네는 1528년 《궁정인》에서 소묘는 예술가의 전유물이 아니라 ‘교양 있는 삶을 지향하는 일반인들의 인성교육에 도움이 되는 필수 과목’이라고 주장한다. 라파엘로의 열렬한 찬미자였던 그는 ‘회화와 조각은 엄연히 다르지만 하나의 샘에서 솟아났고, 그 샘의 이름은 소묘’라고 덧붙였다. 그 당시 소묘는 ‘설계’, ‘계획’, ‘도안’, ‘아이디어’라는 의미들을 함축하고 있었다.
첫 시작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소묘를 ‘회화 예술의 개선문’으로 보았던 첸니니(1390?)만 해도 고작 고대 조각이나 다른 선배 대가들의 작품을 베끼고 모사하는 방편으로 간주했을 뿐이다. 르네상스 최고의 미술 이론가 알베르티, 그리고 그의 이론을 대부분 답습하며 ‘소묘란 회화의 바탕’이라고 말했던 기베르티도 그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극성기 르네상스에 이르러 소묘는 밑그림·습작·카툰 따위 이전에 실행되었던 기술적 표현 수단의 공방 환경에서 벗어나 르네상스 고유의 정신적 전제들과 만난다. 자연과 인체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무르익으면서 자연현상과 원리를 탐구하고 소묘가 일약 예술적 창의와 실험을 펼치는 사유 형식으로 등장한 것이다. 식물의 생장, 새의 비행기술, 물살의 흐름, 인체 구조, 축성법과 과학 도구에 이르기까지 지칠 줄 모르는 관심을 보였던 다빈치의 소묘를 보면 미술 작업과 별로 상관이 없어 보인다. 그보다는 세상의 이치를 밝히고 과학적 인식에 이르기 위한 소묘의 목적에 충실하다. 그런 레오나르도가 소묘를 과학으로 규정한 건 당연했다.

“소묘는 과학(scienza)이다. 소묘는 또 조물주가 창조한 가시적인 세상을 깡그리 재현해 내는 신의 성질을 가지고 있으니 과학보다 낫다.” 미켈란젤로도 소묘의 숨은 힘을 잘 알고 있었다. 프란치스코 데 홀란다에 따르면, 미켈란젤로는 “소묘는 모든 회화 예술의 원천이자 영혼, 그리고 모든 학문의 뿌리”라고 칭했다고 한다. 또 말썽꾸러기 제자 안토니오 미니한테 “소묘를 하게, 소묘를! 안토니오. 시간을 한시라도 아껴서 소묘 연습을 해야 하네”라고 닦아세웠던 일은 너무도 유명하다. 훗날 바사리는 스승의 자세를 이론화해서 그의 전기 머리에다 정리해 두었다. “소묘는 조형예술의 능동적·창조적 원리다.… 이 원리는 정신에서 나오고, 만물로부터 보편정신의 요소를 길어 낸다. 그러므로 소묘는 자연이 드러내는 모든 현상의 원형, 곧 첫 그림에 해당한다.”

여기까지의 기록들은 르네상스 소묘가 ‘과학’에 뒤지지 않는 인식 수단이고, 예술 작업의 기초를 이룬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소묘를 통해서 예술가는 신과 어깨를 겨룬다는 자부심은 르네상스 이전에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이다. 이런 사상은 1563년 바사리가 첫돌을 놓은 피렌체 디세뇨 아카데미와 1590년 추카리의 첫 교장직을 맡았던 로마 성 루가 아카데미의 교육이념에서도 고스란히 되풀이된다. 매너리즘 화가 추카리는 소묘 과정을 머리와 손으로 나누어서 설명했는데 정신적 구상단계를 ‘내적 소묘’, 눈에 보이는 실행단계를 ‘외적 소묘’라고 불렀다. ‘햇살이 자연을 비추고 기운을 불어넣고 생명을 일깨워서 새로운 것을 태동하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소묘를 예술가의 인식과 행위를 북돋우는 힘으로 보았던 매너리즘 미술론은, 한편 예술적 디세뇨와 철학적 이데아 사이의 경계를 허물었다.

'이데아는 물질적 실재를 넘어서는 정신적 진리의 총체’라고 정의한 피치노의 철학이 한 세기가 지나고 나서 미술의 심지에다 불을 당긴 셈이다. 소묘의 가치가 새롭게 인식되면서 미술 아카데미 필수 과목으로 자리잡고, 소묘 전문 수집가가 출현한 것도 흥미로운 현상이다. 아레티노가 미켈란젤로의 소묘 한 점을 손에 넣으려고 애태운 일, 라파엘로가 뒤러에게 ‘제 손을 보이려고’ -자신의 소묘 솜씨를 자랑하려고- 소묘 한 점을 선물로 보낸 일, 바사리가 ‘많은 수고와 재력을 쏟아서’ 여러 작가들의 소묘를 체계적으로 구입하고 정리해서 《소묘 앨범》를 애장하게 된 일이 그런 사례다. 미켈란젤로는 죽기 전에 자기가 그린 소묘들을 죄다 태워 버렸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출처 : 월간 미술

세계고층건물과 kim sanghoon건축이야이




건축디자이너 컴퓨터그래픽,건축과 문화 그리고
세계고층빌딩에 대한 디자인적 유권해석을 공유하고싶으며,기타 건축가들의 작품에 대한 기사나 자료를 공유하며 연구하고싶다. 저작자.상엽생각

1931년 미국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 준공되면서 시작된 초고층 빌딩 건설의 역사는 요즘 그 절정을 맞고 있다. 미국의 경우 뉴욕의 프리덤 타워(541m), 시카고의 포드햄스파이어 타워(610m)가 건설 중이고, 상하이 세계무역센터 빌딩(492m)은 내년 3월 완공될 예정이다. 현재 세계 최고의 마천루는 대만의 ‘타이베이 101빌딩’으로 높이가 508m이다. 내년 말엔 두바이의 ‘버즈두바이 빌딩’(800m)이 최고층의 타이틀을 차지하게 된다.
산업혁명이후 산업구조사회의 출현으로 인한 사회 경제적 요구에 따라서 고층 건축은 새로운 건축과제로 대두되었으며, 나아가 초고층 건축물은 도시에서 필요로 하는 공간수요를 충족하기 위한 기능뿐만 아니라 도시전체의 형상을 결정하는 상징적 주체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기에 이르렀다.

하늘에 보다 가까이 닿으려고 하는 인간의 욕망은 태고 시대부터 현재까지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 전설의 바벨탑, 이집트의 피라미드에 이어서 중세 서양의 엄숙한 고딕성당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시도가 이루어져 왔으며, 근세 들어와 산업국가로서의 자신들의 첨단 기술력, 경쟁력을 과시하기 위한 초고층건물이 건축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이러한 건축역사를 이어왔다.


세계 각국이 초고층 건물을 짓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초고층 건축물은 당대의 첨단 건설기술이 총체적으로 집약된 결정체로 기술 및 경제적 파급효과가 매우 커 건설산업은 물론 관련 산업의 기술까지도 한 단계 진일보시킬 뿐만 아니라 고용 창출효과도 크다. 게다가 초고층 건물 자체가 한 국가의 상징물 또는 경제 성장의 척도로 인식되고, 그 나라 국민들의 자긍심을 높여준다. 또 초고층 빌딩은 그 자체만으로도 랜드마크로 인식되어 세계인의 이목과 발걸음을 모으는 국제적인 관광 명소 역할도 한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건물은 타워팰리스(264m)로 전 세계 70위권 높이다. 하지만 주거용 건물인 타워팰리스를 우리나라 대표 랜드마크로 내세우기는 쑥스럽다. 우리나라도 국가 위상이나 경제 규모에 걸맞은 초고층 빌딩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각종 규제와 관련 법규의 미비 그리고 인·허가 관청의 소신 부족 때문에 랜드마크 빌딩 건립이 계속 지연되고 있다. 우리는 친환경적이면서 다양한 도시기능을 갖춘 초고층 빌딩을 지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이제 초고층 빌딩시대를 맞이할 채비를 서둘러야 한다.
전 세계가 ‘랜드마크’ 경쟁하는데
언제까지 규제·사회 인식에 갇혀 타워팰리스를 최고층 건물로 삼아야하나

김종훈 건설산업비전포럼 공동대표 (일부분 글 중에서)


역사상 가장 높은 건물은 이집트(피라밋 , BC 2세기), 독일(퀼른성당, 13세기), 프랑스(에펠탑, 19세기), 미국(엠파이어 빌딩, 20세기)순으로 변해왔고, 지금 현재는 아시아 국가가 최고층 건물을 보유하게 되어 높은 건물 순으로 문명의 중심이 이동하는 것 같아 흥미롭다.

Design Yoo the construction D person against your computer graphic, a construction and a culture and the world-wide high building to recommend it wants owning jointly three, it owns jointly the article or the data against the work of the other architects and it wants researching. Author - upper Yub thought Em fire stay of 1931 United States thu the history of the rough copy layer building construction where the building is started to be completed is meeting the summit of now. phu li tem The tower (541m) of case New York of the United States and the Ford ham spy U tower of Chicago (610m) while and the Shanghai world trade center building constructing (492m) are the plan which March will be completed next year. Currently the skyscraper of the best in the world the tie hemp cloth of Taiwan height 508m is with 101 building. To late next year two at all pe cu two the building (800m) hold it is done the tie frame of this highest layer at all and. It raises its head with the construction subject where the high construction is new consequently in the social economic demand which is caused by with appearance of the Industrial Revolution after industrial structure society, further the rough copy layer building the space demand which from the city it does in necessity is sufficient and only the function for the bay it knows it takes charge of the role as the symbol subject which decides the form of the city whole, it reached. Sees in sky and nearly reaches the desire of the human being from ancient time until currently continuously to be joined together, it is come. Is tower of Babel of legend and a pyramid of Egypt it reaches to the Gothic Catholic church which the medieval West is serious until it is cut and the reading becomes accomplished and it comes, shows off the up-to-date technical power and a competitive power of the themselves as the modern age coming in industrial country the candle skyscraper for with development of construction technique to join in, it was like this architectural history and it came. The world-wide various nations makes the rough copy layer building and there is a multi reason which is burnt. The rough copy layer building the technique and economic ripple effect building industry even until technique of of course relation industry one phased position daily report only will make the bay know job creation effect grow very big with the decisive body where the up-to-date construction technique of present generation is whole integrated. In addition the rough copy layer building form will be recognized at the symbol water of one nation, or the scale of economic growth the self-conceit of those country citizens it will plant and to raise. Also the rough copy layer building even with only the form is recognized with land mark and the international which collects the world-wide humanity and justice ear and a step also sightseeing place of interest role does. Currently the most tall building the tower phayl li su (264m) with 70 place whole worlds volume raises from our country. But the tower which is a house building phayl li su it stands with our country representative land mark it is unseemly. It soaks but there is a necessity which will have the well-mated rough copy layer building in national phase or economic size. It is like that with various regulation relation law deficiency and is and the land mark building erecting continuously is delayed belief insufficient because of the permission government office. We various are environment hits and we are and it equips the ability which is the possibility of making the rough copy layer building which equips the royal tomb which it illustrates. Rough copy layer building time it does to haste Maj two percentage preparations recently. The whole world land mark the place where it competes until when confines in regulation social recognition and the tower phayl li su highest layer it makes without knowing why, one Kim bell Hoon building industry vision forum commonness representative (from in partial writing) At history the most tall building comes Egypt (blooms Mis, BC 2 century), Germany (quill lun Catholic church, 13 century), France (pheyl tower and 19 century) and the United States (Em fire building, 20 century) pure with explanation, being revealed the Asian country is possessed the highest layer building now and to appear the center of civilization to be moving toward the tall building order it is interest Ro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