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7월 16일 월요일

골프 파크





골프장 [golf場]
[명사]<운동·오락> 골프를 칠 수 있도록 설치한 경기장.
a golf course;(a) golf-links;a green코스 위에 정지하여 있는 볼을 클럽으로 쳐서 정해진 홀에 넣어 그때까지 소요된 타수로 우열을 겨루는 경기.

구분 구기경기
기원국 스코틀랜드·네덜란드
한국도입시기 1890년경
코스 위에 정지하여 있는 흰 볼을 지팡이 모양의 클럽으로 잇달아 쳐서 정해진 홀(球孔)에 넣어 그때까지 소요된 타수(打數)의 많고 적음으로 우열을 겨루는 경기이다. 골프코스는 들판·구릉·산림 등 66만∼100만㎡의 넓은 지역을 이용하여 정형(整形)되어 있고, 해변에 만들어지는 시사이드 코스와 내륙에 만들어지는 인랜드 코스가 있다.

넓은 코스에 숲이나 계곡, 연못, 작은 산 등의 장애물을 인공적으로 만들기도 하고, 자연의 강이나 바다를 이용하기도 한다. 볼을 처음 치기 시작하는 지역인 티잉그라운드 및 페어웨이·러프·벙커·워터해저드·그린·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가운데 페어웨이와 러프를 총칭하여 스루더그린이라 하고, 벙커와 워터해저드를 총칭하여 해저드라고 한다.

또 코스와 경계는 목책이나 말뚝으로 표시하는데, 경계 밖을 OB라고 한다. 볼을 쳐서 넣는 구멍인 홀의 수는 정규의 것은 18개로 18홀이라 부르며, 전반의 9홀을 아웃이라 하고 후반의 9홀을 인이라 부른다. 공식 선수권대회를 행할 수 있는 코스는 전체길이가 6,500야드(5,940m) 이상이어야 한다. 플레이어는 한 홀에 볼을 넣고 나면 다시 다음 티그라운드에서 새로운 홀을 향하여 플레이한다.

초창기에는 이들 코스의 구획도 골프장의 넓이에 따라 달랐으며, 홀의 수도 일정하지 않았다. 즉 홀 수가 27∼72개인 경우도 있는 등 통일되지 않았는데, 1764년 스코틀랜드의 세인트앤드루스(Saint Anderws)에서 18개로 개조되었고, 이것이 모델이 되어 현재의 모든 코스 단위는 18홀로 고정되었다. 이때부터 골프의 기술적 수준이 스코어에 의해 기록에 남게 되었다.

골프 코스는 2타로 그린에 도달할 수 있는 홀 10개, 3타로 도달할 수 있는 홀 4개, 1타로 도달할 수 있는 짧은 거리의 홀 4개로 조합된 것을 표준형으로 본다. 그린에의 샷은 정교한 기교를 필요로 하고, 마지막으로 지름이 11㎝도 채 못되는 홀에 볼을 넣는 것은 당구와 같은 섬세성을 필요로 하므로 종합 스포츠로서의 특색을 갖추고 있다.

한편, 코스를 1바퀴 돌면 7∼8㎞의 거리에 이르므로 하이킹 또는 사냥 등과 같은 레크리에이션 효과를 즐길 수도 있다. 핸디캡의 채용으로 남녀노소가 동등하게 기(技)를 겨룰 수 있으며, 룰 적용의 심판은 플레이어 자신이 해야 하고, 규칙은 다른 스포츠에서는 볼 수 없을 만큼 미묘하게 세분화되어 있는 점이 골프의 특징이다.
골프의 기원은 스코틀랜드 지방에서 양을 기르던 목동들이 끝이 구부러진 나뭇가지로 돌멩이를 날리는 민속놀이가 구기로 발전했다는 설과 기원전 네덜란드에서 어린이들이 실내에서 즐겨하던 콜프(kolf)라는 경기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다. 또한 네덜란드의 콜벤이라는 오늘날의 크리켓이나 아이스하키와 비슷한 구기가 14세기경 바다를 건너 스코틀랜드에 전래 되었다는 설이 있다.

15세기에는 골프가 지나치게 성행하여 국민의 무도(武道)와 신앙에 방해가 된다고 해서 칙령으로 전면금지하거나, 안식일에는 플레이를 금지하였다. 골프는 귀족계급에도 만연되어 왕도 즐겼으며, 16세기 이후에는 신분의 상하를 불문하는 스포츠로까지 발전되고, 잉글랜드에까지 파급되었다. 골프를 ‘Royal and Ancient Game’이라고 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골프에 관해 발견된 기록에 의하면 1744년 스코틀랜드에서 지금의 에든버러골프인협회의 전신인 신사골프협회가 조직되어 경기를 한 것이 골프클럽과 경기대회의 시초이다.

처음에는 실버클럽대회라 하여 실물 크기로 만든 은제 트로피를 만들어 쟁탈전을 벌였다. 이 협회의 의사록에는 13개조로 된 세계 최초의 골프규칙이 기재되어 있으며 이것이 현행 골프규칙의 기반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뒤 스코틀랜드·잉글랜드 각지에 골프클럽이 만들어졌으며, 또한 선수권대회 형식의 경기도 시작되었다.

스코틀랜드의 세인트앤드루스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여겨지는 코스(올드코스)가 있다. 이곳에서 1754년 5월 14일 22명이 모여 ‘더 소사이어티 오브 세인트앤드루스 골퍼즈’를 결성하였으며, 경기규칙의 제정, 핸디캡의 통일, 선수권 대회의 개최 및 운영을 담당하였다. 이를 계기로 이 클럽이 영국 골프계를 통할하게 되었다. 한편 여성골프클럽은 1872년 세인트앤드루스에서 조직되었다.

골프가 활발해지자 클럽이나 볼을 전문적으로 만드는 직인이 나타났으며, 이들은 골프 기술에도 능했으므로 실기교습에 종사하여 프로페셔널로서 인정받았다. 1860년 처음 제1회 영국 오픈 선수권 대회가 열렸으며, 1885년에는 전영 아마추어 선수권 대회가 시작되었다.

골프는 19세기 후반에 영국에서 신대륙으로 건너가 1873년 캐나다에 아메리카 대륙 최초로 로열몬트리올골프클럽이 창설되었으며, 1887년 미국 최초의 클럽과 코스를 자랑하는 폭스버그골프클럽이 발족되었다. 그후 20년도 못되는 동안에 황금기를 구가함으로써 영국에 맞먹는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1894년 미국골프협회(USGA)의 전신인 미국아마추어골프협회가 창립되었고, 1895년 제1회 아마추어선수권대회가 개최되었으며, 같은해에 전미(US) 오픈선수권대회도 시작되었다. 현재 미국에 있는 3,400개 이상의 골프클럽이 미국골프협회에 가입했으며, 9개의 국내선수권대회와 6개의 국제아마추어선수권대회를 주관하고 있다.

미국의 골프는 20세기부터 영국을 능가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영국은 국력이 피폐해지면서 골프계도 침체되었다. 게다가 제2차 세계대전 후의 호경기에 의해서 미국 골프의 대중화는 눈부시게 진전하여 모든 면에서 영국 등을 압도하였다.
한국 골프.한국에는 1897년 무렵 함경남도 원산을 통하여 들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골프의 시초는 1900년경 함경남도 원산항의 한국정부 세관관리로 고용된 영국인들이 세관 안의 유목산 중턱에 6홀의 골프장을 만들어 경기한 것이 처음이다.

또 1913년 원산 근처 갈마반도(葛麻半島)의 외인촌(外人村)과 황해도의 구미포(九味浦)에도 외국인 코스가 있었고, 나무울타리로 막아 한국인은 물론 일본인 출입도 금지했기 때문에 규모는 알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국골프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영친왕(英親王)이다. 영친왕 부처는 1924년 무렵부터 일본에서 골프를 치기 시작해서, 이따금 서울에 와서 골프를 즐기기도 했다.

1921년 조선철도국은 미국인 댄트의 설계로 지금의 서울 효창공원(孝昌公園)에 9홀의 코스를 만들었다. 그러나 효창공원 골프장은 1923년 일대가 공원으로 지정됨에 따라 폐장되고 1924년 이왕가(李王家)의 육림 중심지인 청량리(淸凉里)로 옮겨 18홀이 완공되었다. 이를 계기로 한국 골프사상 처음으로 ‘경성골프구락부(京城俱樂部)’라는 골프클럽이 탄생하였다.

그 뒤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에도 골프장 건설붐이 일어났으며, 이같은 영향으로 1937년 9월 전국 골프구락부 협의기관인 조선골프연맹 창립총회가 경성골프구락부에서 열려 한국골프를 새롭게 도약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 프로골프의 역사는 연덕춘(延德春)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17세 때부터 골프를 배웠으며 일본인의 주선으로 일본에 가서 골프수업을 받고 3년 만에 일본 오픈경기에 출전하여 8위에 드는 급성장을 보였다.

1941년 한국인으로는 처음 일본 오픈경기에서 패권을 잡았다. 그가 배출한 수많은 프로선수 중에서 한장상(韓長相)이 1972년 일본 오픈경기에서 한국인으로서는 두번째로 우승하였다. 한장상·김승학(金承學) 조는 1971년 미국에서 열린 월드컵 골프에 출전하여 단체 5위에 들기도 했다.

1970년대에는 한장상이 한국 오픈경기를 제패하였고, 김승학은 아시아 서킷 1차전인 필리핀 오픈경기에서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우승하였다. 또 1974년 조태운(曺泰雲)이 한국 오픈경기에서 우승을 차지함으로써 한국 프로선수들은 큰 타이틀 5개를 쟁취하는 사상 초유의 ‘황금의 3년’을 맞이하였다.

1980년대 이후에는 최상호(崔上鎬)가 두각을 나타냈으며, 여자 프로골퍼로는 구옥희(具玉姬)가 미국과 일본에서 활약, 국제적 명성을 떨치고 있고, 원재숙(元載淑)·고우순(高又順) 등도 일본에서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였다. 재일교포 김영창(金榮昌)은 1981년 미국에서 열린 제22회 세계아마시니어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여 세계 정상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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