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2월 29일 금요일

호국충절의 상징 삼학사는 병자호란 때(1636년) 침략국 청나라를 상국(上國)으로 모실 것을 요구하는 화의를 반대하다 청나라(지금의 중국) 심양으로 끌려가 순국한 홍익한 · 윤집 · 오달제 선생을 말한다. 독립기념관에 삼학사비를 세운 목적은 국난을 당했을 때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같이 버린 삼학사분들의 호국충절의 기개와 정신을 기리고 본받아 나라사랑 정신을 갖게 하고자 건립하였다.이 비는 원래 순국한 삼학사에 대하여 청태종이 비록 적국의 신하지만 삼학사의 충절에 감복하여 삼한산두(三韓山斗 : 태산처럼 높고 북두칠성처럼 빛남)라는 휘호를 내리고 충절을 기리는 비와 재단을 세워 매년 제사를 지내게 하였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파괴되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1935년 만주 지역의 동포들이 성금을 모아 비를 재건립 하였지만 문화혁명 시기에 다시 파손되었다.
민족사의 계통을 명백히 정립하고, 고구려인의 기상을 보여주는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를 독립기념관 겨레의 큰 마당에 재현하였다. 6.4m의 거대한 광개토대왕릉비는 4면에 새겨진 1,800여자의 비문을 통해 고구려의 역사적 사실을 전하고 있다.

북관대첩비 복제비는 임진왜란(1592년 ~ 1598년) 당시 북평사 정문부가 이끄는 의병들이 왜장 가토 기요마사의 왜군들을 격파한 것을 기념해 숙종 34년(1708년)에 세워진 대표적인 국난극복의 승전비이다. 그러나 러 · 일 전쟁 (1904~5년) 당시 북관대첩비는 일제가 강탈해가 지난 100년간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에 방치되었으나 우리나라의 끈질긴 요구로 2005년 10월 20일 반환된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북관대첩비 원비는 2006년 3월 1일 북한 함경북도 김책시 림명리(옛 이름 길주)로 반환되었고, 2기가 복제되어 그 중 1기가 독립기념관에 세워진 것이다.복제비는 원래의 비신과 유사한 충남 보령 웅천산 애석을 사용하였고, 머리돌과 받침돌은 황해도 해주산 화강석을 사용하였다. 높이는 2.75m이며 의병단의 활약상을 담은 1,500여자의 한문이 새겨져 있다



kim sangh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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